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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14 17:39

두 번 째 실연-<활과 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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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실연'에 이끌려 이 글에 들어온 분들께 사과 말씀드립니다. '실연'은 이 글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는 못합니다^^ >

옥타비오 파스, <활과 리라>(김은중, 김홍근 옮김, 솔, 1998)

-존재의 내부, 생의 내장-

<활과 리라>는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멕시코, 1914-1998; 1990년 노벨 문학상 수상)가 쓴 책이다. 서점에서 이 책을 산 이유는 ‘활과 리라’ 이미지가 던지는 힘과 첫 문장 때문이었다. 이 책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글을 쓴다는 것은, 아마도 언젠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던져서, 그에 대해 답할 수 있을 때까지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질문에 대답하려 애쓰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이외에 더 적절한 정의는 없을 것이다.”

글이 어떤 괴로움과 관련을 가진다는 구절을 보고 문득 나의 괴로움이 떠올랐다. 대학 4학년 때 나는 2번째 실연을 했다. 그 무렵 한참 동안 밤에 잘 때 농문을 열어 이불을 꺼내고는 농문을 다시 닫지 않고 지냈다. ‘내일 아침 다시 이불을 넣을텐데, 뭐.’ 하는 생각이었다. 오늘과 같은 내일이 싫었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그녀가 없다는 점이 같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어제, 오늘, 내일로 이어진다는 사실이 견디기 어려웠다. 연속극도, 소설도 보기 싫었다. 나도 아마 드라마의 주인공이었겠지만, 드라마가 싫었다. ‘내일 아침에도 그녀가 없을텐데, 뭐’하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결코 시간의 그물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웠다. 이 무렵 시집을 가까이 했다.

가령, 김수영의 시 에는 ‘VOGUE’ 잡지와 ‘마룻바닥에 깐 비니루 장판에 구공탄을 떨어뜨려 탄 자국’, ‘내 구두에 묻는 흙’, ‘변두리의 진흙’이 뒤섞여 있다. ‘VOGUE’, ‘구공탄’, ‘구두’, ‘변두리’가 뒤섞인 세계가 나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이 무렵 많이 읽힌 시집 가운데, 황동규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를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굴리고 싶어진다. 노점에 쌓여 있는 귤, 옹기점에 엎어져 있는 항아리, 둥그렇게 누워 있는 사람들, 모든 것 떨어지기 전에 한번은 날으는 길 위로.’ 은 나란히 서 있다. 이 시가 쓰여지기 전에 ‘귤’ ‘옹기점’ ‘길’같은 사물들이 아무런 연속성이 없었는데, 이 시 속에서 시치미를 뚝 떼고 나란히 서 있다.

시를 읽으면 읽을수록 시집을 넘기면 넘길수록 나는 내가 던져버린 삶 속에도 연속성이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실연’와 ‘연애’ 사이에도, ‘오늘’과 ‘내일’ 사이에도 내가 알 수 없는 연속성이 존재하리라. 존재와 존재의 경계가 흐릿해지면서 그 사이에 새로운 경계선이 생겨났다. 나는 다시 내일을 믿게 되었고 밤에 잘 때 농문을 닫을 수 있게 되었다.

옥타비오 파스의 책 제목 <활과 리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유에서 따온 것이다. “활의 시위나 리라의 현처럼, 우주는 팽팽한 긴장 상태에 있다.” 이에 대해 파스는 이렇게 풀이한다. “인간의 신비는 인간이 우주적 질서의 한 매개체, 즉 거대한 협주곡의 화음이며, 또한 자유이기 때문이다. 고통은 불협화음이다. 그리고 의식은 존재의 리듬과 화음을 이룬다. 운명의 신비는 그것이 자유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연유한다. 자유가 없이는 운명은 완수되지 않는다. 263쪽”

파스는 인간의 신비가 자유과 운명, 화음과 불협화음에 낀 고통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인간의 신비는 인간의 고통으로 드러난다. 이것은 인간의 모순이고, 이중성이다. 하지만, 파스는 이러한 인간의 이중성이야말로 ‘존재의 내부’라고 말한다.

“아즈텍 문명의 조각상에서도 신성은 꽉 채워지고 충만한 모습으로 조각된다. 하지만 무서움은 단순히 형상과 상징이 많이 모였기 때문이 아니라, 한 순간 한 모습 속에 존재의 두 면이 한꺼번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 무서운 광경은 존재의 내부를 보여준다. 코아틀리쿠에(神像)는 이삭과 해골 그리고 꽃과 발톱으로 꾸며져 있다. 그의 존재는 모든 존재를 포함한다. 속에 있던 것이 밖으로 드러나고, 마침내 생의 내장이 눈앞에 드러난다. 하지만 생의 내장은 바로 죽음이다. 삶은 죽음이다. 그리고 죽음은 삶이다. 소화기관은 동시에 파괴 기관이기도 하다.173-4쪽”

‘활과 리라’의 이미지는 이 책을 꿰뚫고 있는데, 책의 에필로그에서 다시 해석된다. “리라는 인간을 성화해서 우주 속에 그의 자리를 마련해준다. 활은 인간을 그 자신 너머로 쏘아 보낸다. 370쪽” ‘활과 리라’는 우주가 존재와 존재의 더미, 덩어리가 아님을 말해준다. 파스는 이렇게 말한다. “항성, 신발, 눈물, 전차, 수양버들, 여자, 사전, 이런 모든 것들은 광대한 가족이며, 서로 의사 소통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며, 모든 형태에는 똑같은 피가 흐르고, 인간은 마침내 그의 욕망-그 자신-을 실현할 수 있다. 149쪽”

이렇게 볼 때, ‘활과 리라’는 시 그 자체, 삶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시는 삶을 묻는 것이고 삶은 시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삶은 그 자신을 포기할 때 - 활이 늘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것처럼 - 구원을 얻을 수 있겠기 때문이다. 파스는 이렇게 말한다. “시는 앎이고 구원이고 힘이고 포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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